비건 화장품 처방과 대체 원료 트렌드
'비건'과 '동물실험을 하지 않았다'는 같은 말이 아닙니다
비건 화장품은 동물에서 유래한 원료를 사용하지 않은 제품을 말합니다. 여기에 흔히 '동물실험을 거치지 않았다'가 따라붙지만, 한국과 유럽에서는 이 문장이 차별점이 되기 어렵습니다.
한국은 「화장품법」 제15조의2에 따라 2017년 2월부터 동물실험을 실시한 화장품이나 동물실험을 실시한 원료를 사용해 제조·수입한 화장품의 유통·판매를 금지하고 있습니다(위반 시 100만원 이하 과태료). 대체시험법이 없는 경우 등 예외가 있지만 원칙은 금지입니다. EU도 Regulation (EC) No 1223/2009로 같은 금지를 두고 있습니다. 즉 국내에 정상 유통되는 제품은 원칙적으로 이미 동물실험을 거치지 않은 제품입니다.
따라서 실질적인 차이는 '원료가 동물에서 왔는가'에서 갈립니다. 크루얼티프리는 시험 방법에 관한 주장이고, 비건은 성분 구성에 관한 주장입니다. 두 표현을 뒤섞어 쓰면 소비자 오인 소지가 생깁니다.
시장 규모도 이 구분을 요구할 만큼 커졌습니다. 국내 비건 화장품 시장은 2022년 약 5,700억 원에서 2025년 1조 원 규모로 성장한 것으로 추정되고, 글로벌 시장은 2026년 약 205억 달러 수준에서 연평균 6%대 성장이 전망됩니다. 다만 이 수치는 정부 통계가 아니라 민간 조사기관 추정치이므로, 인용할 때는 출처를 함께 밝히는 편이 안전합니다.
이름만으로는 유래를 알 수 없는 성분들
전성분표를 처음 검토할 때 눈에 띄는 것은 대개 밀랍(Cera Alba), 라놀린, 꿀, 프로폴리스, 로열젤리 정도입니다. 실제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름만으로 유래를 판단할 수 없는 성분들입니다.
카민(CI 75470)은 연지벌레에서, 구아닌은 어린(물고기 비늘)에서, 키토산은 갑각류 껍질에서, 셸락은 락깍지벌레의 분비물에서 얻습니다. 실크·세리신·가수분해실크, 케라틴, 엘라스틴도 동물 유래입니다.
더 까다로운 것은 이름은 같지만 출처가 갈리는 성분입니다. 글리세린과 스테아릭애씨드는 우지에서도, 팜이나 코코넛 같은 식물성 유지에서도 만들어지며 INCI 명칭이 동일해 표시만으로는 구별되지 않습니다. 알란토인은 합성품과 컴프리 유래가 함께 쓰이고, 히알루론산은 과거 닭벼슬에서 얻었으나 현재는 미생물 발효가 사실상 표준 공정입니다. 이런 성분은 반드시 원료사 확인서로 유래를 확정해야 합니다.
대체 원료 — 단순 치환이 아니라 재설계입니다
스쿠알란은 대체 원료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입니다. 1950년대 화장품에 도입될 당시 원료는 상어 간유였고, 남획 문제로 EU에서는 2009년 이후 사실상 퇴출되었습니다. 현재는 올리브 유래 스쿠알렌을 수소화한 것과, 사탕수수 당을 조작된 효모로 발효시켜 파르네센을 거쳐 만든 바이오 스쿠알란이 시장을 나눠 갖고 있습니다. 최종 분자는 동일하지만 공급 안정성과 가격 변동 폭이 달라, 처방 표준화 관점에서는 발효 유래가 유리한 경우가 많습니다.
왁스류는 사용감과 물성이 함께 바뀝니다. 밀랍을 대체할 때 칸데릴라 왁스는 경도가 높고 광택이 강하며, 해바라기 왁스와 라이스브란 왁스는 상대적으로 부드럽고 융점 거동이 다릅니다. 같은 배합량으로 치환하면 립·밤 제형의 경도와 발림성이 그대로 달라지므로, 대체는 성분 교체가 아니라 제형 재설계로 접근해야 합니다.
단백질 계열도 마찬가지입니다. 동물 유래 콜라겐은 미생물 발효로 생산한 재조합 콜라겐이나 기능이 유사한 펩타이드로 대체합니다. 다만 '식물성 콜라겐'이라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콜라겐은 동물에만 존재하는 단백질이므로, 식물 유래 성분은 콜라겐이 아니라 콜라겐 생성을 돕거나 유사한 사용감을 내는 별개의 물질입니다.
인증 — 전부 민간 기준이며, 기관마다 다릅니다
국내에는 비건 화장품에 대한 국가표준이나 정부 인증이 없습니다. 다만 표시·광고 측면에서 하나의 공적 장치가 있습니다. 식약처는 「화장품 표시·광고를 위한 인증·보증기관의 신뢰성 인정에 관한 규정」에 따라 2020년 6월 30일 (주)한국비건인증원을 인정번호 제1호로 지정했습니다(식품의약품안전처 공고 제2020-276호). 현재 이 규정에 따라 비건 분야에서 신뢰성을 인정받은 유일한 기관입니다. 인증 자체가 국가 인증이라는 뜻은 아니고, 화장품 표시·광고에 활용할 수 있는 인증기관으로 신뢰성을 인정받았다는 의미입니다.
기관별 기준 차이는 개발 일정과 비용에 직접 영향을 줍니다. 한국비건인증원은 동물 유래 원재료 미사용, 교차오염 방지, 동물실험 미실시의 세 축으로 심사하며, 서류 검토와 교차오염 방지 기준서 검토에 더해 동물성 유전자 검사를 시행합니다. 인증 유효기간은 12개월입니다.
영국 비건 소사이어티의 비건 트레이드마크는 동물 유래 성분 배제와 동물실험 배제에 더해, 유전자 변형 생물 개발 과정에 동물 유래 물질을 사용하지 않을 것을 요구합니다. 동물실험에 대해서는 특정 기준일(cut-off date)을 두는 방식을 인정하지 않으며, 교차오염은 합리적으로 실행 가능한 범위에서 최소화하도록 규정합니다. 유럽에서 널리 쓰이는 V-Label은 최종 제품에 포함될 수 있는 비건 아닌 물질을 0.1% 미만으로 수치화해 규정하며, 인증 유효기간은 36개월입니다.
정리하면 심사 강도, 교차오염 허용 수준, 비용 산정 방식, 유효기간이 기관마다 다릅니다. 타깃 시장과 유통 채널을 먼저 정하고 그에 맞는 기관을 개발 초기에 확정하는 편이 재심사 비용을 아낍니다.
2026년 9월, '비건'이라는 말 자체가 규제 대상이 됩니다
유럽의 그린 클레임 규제가 비건 표기에 직접 영향을 줍니다. 소비자의 친환경 전환 역량 강화 지침(EmpCo, Directive (EU) 2024/825)은 2026년 9월 27일부터 회원국이 집행하며, '친환경', '에코', '기후 중립' 같은 모호한 표현을 검증된 근거 없이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비건 브랜드가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중복 클레임' 조항입니다. 어차피 그럴 수밖에 없는 속성을 별도의 장점처럼 내세우는 표현이 규제 대상이 되는데, 앞에서 본 것처럼 한국과 EU에서는 동물실험이 이미 법으로 금지되어 있으므로 '동물실험을 하지 않았습니다'를 차별점으로 강조하는 문구가 정확히 여기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구분해 둘 것이 있습니다. 이와 별개인 그린 클레임 지침(Green Claims Directive) 제안은 2025년 6월 집행위원회가 철회 의사를 밝히면서 입법 절차가 멈춘 상태입니다. 지금 대비해야 하는 것은 그쪽이 아니라 이미 확정된 EmpCo입니다. 업계에서는 기존 재고에 대한 경과 규정을 요구하고 있으나, 2026년 8월 현재 유예 조항은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개발 단계에서 실제로 필요한 것
비건 처방의 성패는 제형보다 서류에서 갈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성분 각각에 대해 원료사의 비건 선언서와 동물실험 미실시 확인서를 확보해야 하고, 유래가 모호한 성분(글리세린, 스테아릭애씨드, 토코페롤, 락틱애씨드 등)은 원산지와 제조 공정까지 명시된 확인서가 필요합니다.
생산 라인의 교차 오염 관리도 문서로 남겨야 합니다. 동물 유래 원료를 다루는 설비와 공유하는 경우 세척 절차와 검증 기록이 그대로 심사 자료가 됩니다.
여기에 대체 원료로 인한 물성 변화를 확인하는 시험이 더해집니다. 왁스와 유화제를 바꾸면 유화 안정성과 방부 시스템의 유효성이 함께 흔들리므로, 안정성 시험과 보존력 시험을 다시 설계해야 합니다.
HBMIC는 원료 선정 단계에서 비건 적합성과 인증 기준을 함께 검토해, 제형이 확정된 뒤 인증 심사에서 되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개발을 진행합니다.